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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눈의 독립운동가? 혹시 아시나요?(5)

Views : 896 2014-11-20 10:59
자유게시판 127006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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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jpg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한국의 영원한 벗’ 헐버트 박사입니다.

 

헐버트 박사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동북부 버몬트주에서 아버지 칼빈 헐버트와 어머니 매리 우드워드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칼빈 헐버트는 미들베리대학의 총장이자 목사였으며 어머니는 매리 우드워드는 다트머스 대학의 창립자 엘리저 월록의 외증손녀였습니다. 때문에 헐버트는 엄격한 도덕성, 인간 중심사상 및 ‘인격이 승리보다 중요하다’는 가훈 속에 성장하였으며, 다트머스 대학에서 수학하고 1884년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마친 후 해외선교사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조선_학생을_가르치는_헐버트.jpg

1886년 박사는 조선에서 육영공원에 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립학교로 양반 자제와 관리들에게 서양식 교육을 하기 위해 세워진 육영공원에서 교사직으로 영어를 가르쳤는데요. 이 때 자신은 자비로 한글 개인교사를 고용하여 3년 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할 정도의 실력을 갖게 되었다고 해요! 게다가 1889년에는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해 육영공원 교재로도 사용하였답니다.

헐버트_사민필지.png

                              [사민필지. 출처 : 위키백과]

1893년 감리교 선교사 자격으로 내한한 헐버트는 다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박사는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출판사의 책임을 맡았으며, 배재학당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박사가 신식 인쇄기를 들여옴으로 인해 2년간 휴간했던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을 다시 발생할 수 있었고, 최초의 영문 소설 한국어 번역판인 ‘텬로력뎡(천도역정)’을 출판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영문잡지인 'The Korean Repository'와 이후 1901년부터 본인이 편집책임을 맡았던 'The Korea Review'에 한국에 관한 10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하여 구미열강에 한국을 알리는데 큰 몫을 하였다고 해요.

 

18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되었습니다. 헐버트 박사는 일본의 침탈행위를 목격하고 한국의 정치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시작하였는데요. 1895년 을미사변 이후 박사는 고종을 호위하고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며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창구 역할을 해왔습니다. 또한 고종황제를 미국공사관으로 옮기려는 ‘춘생문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기도 하였다고 해요.

 

헐버트는 YMCA의 창설과 초대회장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근대적 사회개혁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러일전쟁 후 일본의 ‘한국 보호통치’ 문제가 표면화되자 워싱턴 밀사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고종의 친서를 휴대하여 워싱턴으로 가 일본 침략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과 미국의 밀약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1906년에 다시 내한하여 1907년 제2차 세계평화회의가 헤이그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을 이준, 이동휘, 김구 등에게 전하고 헤이그 밀사의 막후활동을 전개하였답니다. 박사는 헤이그 밀사 3인과 함께 각국 대표에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불어로 번역된 호소문은 언론을 통하여 세계 각국에 알려지게 되었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은 외교권이 상실되었다는 이유로 참가자격을 얻지 못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Hague_Secret_Emissary_Affair.jpg

[헤이그 특사인 이준, 이상설, 이위종. 헐버트 박사는 

이들을 네덜란드 헤이그로 파견하는데 크게 일조했다.]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 된 헐버트 박사는 미국에 돌아간 후에도 순회강연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습니다. 박사는 미국 전역과 전세계의 각종 회의와 강좌에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였고 한국의 독립에 관한 글을 썼으며, 1918년에는 파리 강화회의를 위해 여운홍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기도 했답니다. 

 

광복을 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된 후, 헐버트 박사는 1949년 국빈자격으로 그토록 갈망한 독립된 한국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러나 내한 후 일주일 만인 1949년 8월 5일 영면하게 되었는데요. 생전 헐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으로 떠나며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고 유언을 남긴 바 있어, 이에 따라 박사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거행하였으며, 현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SAM_1255.jpg


한글의 띄어쓰기를 처음 시도한 사람이 이분이시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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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DDY [쪽지 보내기] 2014-11-20 11:07 No. 1270061525
74 포인트 획득. 축하!
이제껏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살았는데 *필고*를 통해 많은것을 배우게 됩니다.이제라도 힐버트 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족발 [쪽지 보내기] 2014-11-20 11:21 No. 1270061580
7 포인트 획득. ... 힘내세요!
좋은정보 잘 보고 갑니다.. 몇십년후 필리핀에도 한국인이 이런 분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세부세부88 [쪽지 보내기] 2014-11-20 11:39 No. 1270061622
42 포인트 획득. 축하!
여태 모르던 사실인데 글 읽으며 울컥 합니다. 감사합니다 힐버트 박사님~
ggangte [쪽지 보내기] 2014-11-20 11:57 No. 1270061675
5 포인트 획득. ... 힘내세요!
힐버트님 땡큐베뤼머취 :)
소나무솔 [쪽지 보내기] 2014-11-20 12:15 No. 1270061735
60 포인트 획득. 축하!
이런글을 읽을때면 고마운 생각이 더오르네요 너무도 감사하고 감사한 생각이 둘어요 할버트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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