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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12편(1)

Views : 1,271 2015-03-03 13:51
자유게시판 1270299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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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님이 가신지 며칠이 지난 9월10일. 오전 오늘은 한낮이 다 되여 수잉지와 기록수, 그리고 통역이 나타나서 지난 기간 조사한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차 조사를 하는 것이였다. 조사라야 지난 가간에 자기네 질문하고 내가 대답한 것을 반복하여 읽어주면서 확인하고는 손가락 지장을 짝으란다.

변방공안국 조사에서는 내가 3명의 탈북자와 연관된 것 외에 더 이렇다 할 것들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공안국에서 나의 가명을 집요하게 물어보았지만 나는 가명을 사용한 적이 없다고 끝까지 거짓 진술하여 그들도 알고 속아 넘어가는 눈치였다.

수잉지가 창문 쪽에서 서성거리며 무엇이라고 중얼거리고 있다. 통역이 나에게 이제는 조사가 다 끝났으니 네가 탈북자 몇 명을 탈출시키였는가? 고 솔직히 말하여 보라고 한다. 나는 지금까지 단신으로 70명 정도 3국으로 보냈으며 보호하였던 탈북자 수는 최소 300명 이상 이니 당신네 북경 공안국에 누구누구 확인하면 그것이 다 내가 보호하고 있다가 3국 탈출을 시키기 위하여 브로커들에게 넘겨준 것이다, 내가 단독으로 일한 것이 70명이다. 그들은 배가 고파 중국에 왔다가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붙잡아 북한에 보내니 그들이 살기위하여 한국으로 가려고 하고 있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가던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갈 수 있게 적극 노력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다음날인가? 간수소 경찰이 나를 불러 내여 조사실에 가보니 두 명의 여자가 무슨 서류인지 책상위에 놓아두고 내가 들어가자 수감자 걸상에 앉으라고 한다. 나는 이 여인들은 무엇을 하는 여자들인가고 생각하는데 통역이 이들은 시린궈러멍 인민검찰원 검사들이며 나에 대한 조사를 하기 위하여 왔다고 한다.

검사는 젊은 여인인데 보기 드물 정도로 아름답게 생긴 여성이 검사란다. 그들은 내가 군인들에게서 조사 받은 내용을 확인하고 사인을 받으니 검찰원 조사는 끝이 난다. 생각보다 너무 싱겁게 조사가 끝난 것이다.

나는 검사들에게 다시 한 번 나와 함께 동행한 북조선인들은 난민이니 중국정부와 해당기관에서 그들의 한국행이 이루어 질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여 달라고 요구하였다. 지금까지 공식 확인된 탈북자 3국 탈출시킨 수는 27명으로 되여 있다.

이것이면 이들은 나에게 7년 이상의 형을 안기고도 남을 것이다. 나는 군인들의 조사에서 2007년부터 탈북자들을 몽고로 보냈다고 하면서 매달 한 팀에서 한두 명씩 줄여서 진술하였던 것이다.

지금 많은 탈북자들이 몽고에 가면 무조건 살아남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중국에 체류 중인 탈북자들에게 알려드리고 싶다. 몽고에서는 탈북자들이 자기네 경내에 들어오면 경우에 따라서 탈북자들을 다시 중국으로 송환하는 경우가 있으며, 탈북자들이 많이 넘어오는 곳에 대하여서는 중국 측에다가 국경경비질서를 강화하여 달라고 통보를 보낸다.

내가 군인들에게 조사 받을 때에도 40x35Cm규격의 수백 쪽되여 보이는 책자를 앞에 가져다 놓고 내가 넘겨 보냈다고 판단되는 탈북자들의 사진을 일일이 손으로 집으면서 네가 보낸 사람들이 맞는가고 확인을 한다.

나는 그 책자를 통하여 2006년 가을부터 2007년6월까지 내가 넘겨 보낸 사람들의 사진을 볼 수 있었으며 중국과 몽고 사이에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이런 국경질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책에는 사진을 복사하여 붙여놓고 일일이 현대 몽고어로 무엇이라고 글을 달아 놓았으며 가끔씩은 현대 몽고어로 된 글을 중국어로 일부 번역하여 놓은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사진자료에는 내가 보낸 팀만 따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고 여러 명의 탈북자들을 함께 세워놓고 사진을 찍은 것이거나 혹은 신분증 사진처럼 찍어서 복사하여 책을 만든 것이였다. 그 책에는 적게는 수백명 이상의 탈북자들의 사진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이자들이 내가 보낸 탈북자라고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첫재로 내가 보낸 탈북자는 모두 몽고어로 된 소개신을 가지고 있다. 둘째로, 내가 보낸 탈북자들은 한 팀에 한 대, 혹은 두 대의 휴대용 전화기를 지참시켜 보냈고, 그들이 방향을 잘못 잡을 경우 내가 중국쪽에서 전화로 방향을 수정하여 주거나 역전이나 군부대에 들어가라고 지령하여 주었다.

셋째로는 모든 탈북자들이 국경선을 넘어가는 방법과 약도를 충분히 숙지하도록 하였으며 한 팀에 중국제 군용 나침판을 한 개씩 주어 대오를 이끌 책임자가 나침판으로 조를 이끌도록 하였다, 등 공통점이 있는데 아마 몽고쪽에서 그와 같은 자료를 다 적어서 보낸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는 중국 군인들이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보낸 사람들만 꼭꼭 집어서 네가 보낸 사람이냐고 물어볼 수가 없다. 분명히 몽고에서는 모든 자료를 다 보내온 것이다. 아마 중-몽 국경협약에 이러한 것들이 다 포함 되여 있었던 것 같다.

나는 2006년도 팀들은 무조건 모른다고 잡아떼고는 내가 2006년12월에 처음으로 국경선을 정찰하고 2007년 1월 중순부터 3-5명씩 데리고 다녔다고 진술하였다. 이렇게 조금 조금씩 인원수를 줄인 것이 27명이 되였던 것이다.

이제 15-30일 안에 재판이 열리게 된단다. 매도 첫 매에 맞으랬다고 모든 것을 빨리 끝장을 내었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나는 기나긴 수감생활에서 날마다 쭤발(침대위에 한줄로 질서 있게 앉아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는 시간, 하루에 8시간 정도 앉아 있는다.)시간이 되면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 하였다.

나는 체계적인 신앙훈련을 받은 사람도 아니며 그렇다고 기도를 잘할 줄도 모른다. 나는 원래 피난처를 운영 하면서도 반드시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분을 모셔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으며 내가 중뿔나게 나서서 가르치고 기도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내가 탈북자들을 인솔하고 3국 탈출의 길에 올랐을 때면 휴식하고 새로운 길을 떠나게 되면 내가 우리 일행의 안전과 탈출의 성공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단히 기도드려 준 것이 전부이다.

나는 앉으면 이번 일이 왜 잘못되였을까?고 생각을 반복하면서 시간이 있는 대로 간단한 기도를 수없이 반복적으로 하였다. 하나님 내가 당신 앞에는 죄인일지라도 이 땅에 죄인은 아닙니다. 저들이 죽어가고 저들이 울부짖는데 내가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그 기나긴 시간에 무슨 말인들 아뢰지 못하였으랴, 기도하다가 생각이 막히면 찬송가가 연속 떠오르고,"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이 하리까?" 나는 일의 성장과 함께 도도하여져 갔고 나는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져 갔다. 아마 하나님이 나에게 시련을 주시고 매로 치는거야? 나는 이렇게 저렇게도 생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많이 하였다.

나에게 재산이 있는가? 명예가 있는가? 그렇다고 따뜻한 가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남들처럼 재간이 없어 교회에, 시민단체에, 그리고 탈북단체에 탈북자들을 끌고 다니면서 선전을 하여 본적도 없다.

적어도 2006년12월 이전에 오신 분들은 나의 이름도 연락처도 모른다. 나는 그들에게서 돈 받을 일도 없고 일 시킬 것도 없으니 그들을 찾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또한 내가 그들을 찾고 부르면 그들은 내가 자기네를 한국에 데려 왔다고 그러는가 하여 부담스러워 할 것이다. 그들이 어느 곳에 가 있던지 그들이 잘살고 잘 되여 지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나는 정말 선전 효과를 노리고 일하는데서는 알짜 문맹자 였던 것이다. 혹시나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도 그들이 부담감을 가질 것 같아 조심스러워 했으며 지금도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한 나에게 이러한 벌을 주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주여, 하나님이 정말 함께 하시고 굽어보신다면 이렇게 할 수가 있을가?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탈북자들에게 무료, 혹은 가장 저렴한 비용을 받고서라도 이 일을 원만하게 하려고 하였으며 내가 일하는 방식과 방법에 대하여 탈북자들이 나에게 침을 뱉더라도 일단은 그들이 살아서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단호할 때에 가서는 단호하게 대응을 하면서 일하였던 것이다.

내가 용단을 내려야 할 때에 우물쭈물한다면 나를 따르던 많은 탈북자들이 그 대가로 생명을 지불하여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을 알고 있기에 3국 탈출의 길에 올라서만큼은 단호하고 엄격하게 질서를 지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렇게 할 때만이 탈북자들의 생명안전을 지켜줄 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였던 것이다.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희생 되여서라도 탈북자 문제만큼은 불을 질러놓아야 한다. 내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나도 북한 사람이니 탈북자들과 같이 북한에 보내달라고 말할 수가 있었으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감옥에서 어떤 일을 내여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 일들은 한국에 있는 뜻이 있는 분들의 몫이고, 나의 바램은 결코 나의 모든 것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쉬는 시간을 조금 내여 놓고는 쭤발시간, 잠자는 시간을 다 이러저러한 기도를 하는데 바쳤다. 비록 숙련되고 다듬어진 기도는 아니였지만 나의 마음속 진실을 솔직하게 이야기 하고 마음껏 외쳐볼 수가 있어서 좋았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기도하고 쉴 때면 찬송가이고 다음은 또 기도하고, "내 고집을 꺾으시려고 시련을 주신 하나님, 나의 자존심을 꺾으시려고 고난을 주신 하나님., 나를 너무나 사랑하는 그 하나님이 축복의 채찍을 드시니,,,

은혜의 통로가 되라고 주님이 주신 시련이라고, 축복의 통로가 되라고 주님이 주신 시련이라고" 아마 나의 인생에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께 매여 달려 본적이 없었다. 사람의 생이란 무엇이게 그렇게 되는지 나도 모른다. 죽기를 각오를 하였으면 빨리 죽는 것이 편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자유를 누려야 하는 것이다.

나도 알게 모르게 삶 쪽으로 생각이 굳어갔지만 결코 비굴하게 살아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모든 욕망의 분출이 기도하고 자기의 운명과 비슷하거나 바라는 찬송가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상상으로 그려보는 것 같았다.

감방안에서 찬송가들을 감상하느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 때도 많았다. 나의 하나님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나는 시시때때로 찾고 외쳐 보았다. 이 길은 내가 원하고 반드시 하여야 할 일이기에 묵묵히 혼자 걸어왔고 나의 인생의 황금기를 바친 것이다. 그 인생의 모든 것이 여기서 끝나다니, 아, 원통하구나.

나는 날마다 똑같이 반복되는 수감생활 중에서 차차 이성을 찾아갔고 조용히 나의 지나온 길들을 되새겨 볼 수가 있었다.

질의 중... 30초 정도 걸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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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007 [쪽지 보내기] 2015-03-03 14:29 No. 127029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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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수감 생활 2주정도때 참으로 미치긋죠 시간이 갈수록 무뎌지고 기도는 점점 늘어만 가고 영사관에서는 답은 안오고 언론은 철철히 통제되어 있고 돌파구를 찾지 못해 더더욱 답답해 지고 누군가의 동반자라도 있으면 위로라도 되지만 타국땅엣서의 수감생활 미쳐 버리죠 ㅋㅋ 그마음 압니다. 저도 해 봣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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