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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16편(8)

Views : 1,566 2015-03-03 21:56
자유게시판 127030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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렬차는 아침에 연길역에 도착하였고 나는 서둘러 왕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제가 알고 있던 분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전에 비하여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연길시 의란진을 막 벗어나는 길목에서 몇 명의 군인들이 버스를 멈춰 세우고 일일이 여행객들을 살펴보고 있다.

내가 여기를 수없이 지나다녀 보았지만 예전에는 없던 검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탈북자들이 여기 저기로 자유로이 다니기가 어려울 것 같았고 특히 담이 약한 탈북자들은 영락없이 잡히게 되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청에 도착한 후 택시를 타고 지인의 집에 도착하니 그분이 얼마나 반갑게 맞아주는지 들떠있는 분위기가 정말 놀랍고 뜨거웠다. 아마 온전히 살아 남을 것 같지 못하던 사람이 기적같이 살아서 그 무엇인가 하여 보겠다고 다시 험한 중국에 온 것이 장하고 대견스러워 그리도 기뻐하시고 반가워하신 것 같다.

우리는 그동안의 있었던 일들을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분은 내가 보내준 돈으로 탈북자 부부가 해산을 할 때 정말 요긴하게 사용할 수가 있어 해산을 순조롭게 하였다는 등 나머지 돈으로는 자기의 아들 고등학교에 보내는데 사용하였다고 하면서 정말 감사해 하였다.

내가 한국에 나와 받은 첫 정착금에서 한국 입국비용200만원을 드리고 H사장님께 300만원을 탈북자 지원에 사용하라고 보낸 다음 제가 어려울 때 일자리 구해주시고 식료품을 가져다 주신 이 분께 100만원을 생활에 보탬을 하라고 보내드린 것이였다. 아마 주변에 살고 있던 탈북자 부부와 어려운 탈북자 몇 분을 도와주신 것 같다.

나는 그분께 앞으로 내가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지원하려고 하니 부모 없는 탈북 어린이나 자립이 불가능한 탈북자들을 소개 하여 주시고 그들을 잘 돌보아 달라고 말씀을 드리였다. 그분은 현재 자기가 아는 아이들이 두 명이 있는데 한국교회나 선교사들이 그들에 대하여 지원을 하여 주시면 좋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어려운 점들을 차근 차근 이야기를 하시는 것 이였다. 내가 한국생활에서 체험을 하고 느꼈던 것 그대로 였다.

우리는 먼저 집 가까운 곳에 있는 여자아이를 보기로 하고 찾아가보니 그 집은 내가 동광쑤니창(세멘트 공장)에 다니다가 병들어 일을 하지 못할 때 돈을 받지 않고 뜸을 떠준 농부의 집이 였다. 그 농부는 정말 마음이 곱고 어려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었으며 탈북자들에 대한 걱정이 많으시던 순박한 농민이 였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인 어머니가 반가워 하시며 한걸음에 달려와 나를 그러 안고는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신다. 나는 그분들께 많은 신세를 지였던 사람이고 하여 지난날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는 조선에서 온 아이를 보려고 왔다고 말씀드리 였다.

주인 어머니는 윗방에 있는 한 여자애를 가리키면서 "야가 조선에서 온 아인데 아버지 엄마 는 아를 여기다 나두고 어디로 간지 모르겠소, 대 여섯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소, 잡혀갔는지? 영 소식이 없소" 라고 말씀하시는데 불편한 기색이 확연히 알리 였다.

내가 방 윗쪽을 바라보니 자그마한 여자애가 컴컴한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얼굴이 가무잡잡하게 생긴 것이 양기가 전혀 없었고 누군가 갑자기 자기가 있는 집에 들어오니 당황스러웠던지 몹시 불안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로 가서 "한번 안아보자" 고 말하면서 아이를 꼭 그러 안아주었다. 찬찬히 보니 그 아이는 사실 영리하게 생긴 아이인데 부모 잃고 남의 집에 있으니 기가 죽어 펴지 못한 것이 였다. 우리는 둘러 앉아서 여자애가 몇 살인가? 조선에서 어느 곳에 살다가 왔고 아버지 어머니는 어데로 갔는가를 하나 하나 물어보았다.

여자애는 13살이고 부모들은 이 근처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아이를 문 앞에 맡겨두고 어데론가 떠났단다. 나는 아이가 불쌍하고 처량하게 느껴지였고 우리 철민이도 이렇게 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가슴이 아파났고 그래서 더욱 이 아이를 어떻게 하나 학교에 보내여 공부를 시키시면 학자금과 생활비는 내가 대여 드리겠다고 말씀 드리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옥별이 였고 주변의 소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한국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우리는 저녁이 다 되여 왕청현 대흥구로 갔다. 그곳에는 철호라는 아이가 있단다. 부모님은 어데로 가시고 그 아이를 어느 교회의 전도사가 맡아 키우고 있는데 너무 힘들어 하신단다. 대흥구에 거의 다 왔을 무렵 한 남자 아이가 다리목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아이가 보였는데 행동거지를 보면 영낙 없이 조선 아이가 틀림이 없다.

차가 다리목 근방에 오니 함께 동행하시던 선생님이 차를 세우게 하시고 내리여 "철호야, 여기 오라"하고 소리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서로가 잘 알고 있은 것 같다. 철호도 부모님을 따라 중국에 왔는데 3형제 중에서 맏이였고 철호밑에 철령이 철웅이 두 동생이 또 있단다.
철호는 부모님과 두 동생이 어느 곳에 가 있는지 모른다고 하면서 말을 하기를 싫어하였다. 철호는 한족 할아버지와 조선족 할머니가 사는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데 그 집 내외분이 다정치 못하여 어린것이 그 집에 있기가 몹시 불편하였던 것 같다.

나는 왕청을 나와 화룡으로 가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여 보았다. 생각 하였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탈북 어린이들이 있을 것 같은 감이 들고 내가 중국을 떠날 때 보다 더 아니 좋은 상황에서 탈북자들이 살아 가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밤 늦어서 나는 화룡에 도착하였고 그전에 알고 지내던 분의 집에서 쉬기로 하고 그 주번 에서 살아가고 있는 탈북자들에 대하여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집 주인분의 이야기는 열기에 올라서 장황하다. 누구는 한국가고, 누구는 잡혀가고, 또 어떤이는 조선에 잡혀갔다가 다시 와서 어디서 무엇을 한다고 상세하게 말한다.

그러면서 "유무고래에 가면 땅굴 파고 사는 아들이 얼마인줄 제 아오? 말 못하오" 하면서 이야기 하는 것이 탈북자들이 살아가는 비참함과 동정심이 짙게 깔려 있었다. 유무고래는 내가 잘 아는 곳이다. 북한을 나와 중국에서 첫 일자리를 잡은 곳이며 그곳에서 42일간 철민이를 데리고 소 방목을 하였으므로 그곳 지형은 지금도 손금 보듯 환하다.

화룡시 부흥향(지금의 룡성향) 룡서촌(시거마을)에서 북서쪽으로 자그마한 고개 두개를 넘어가면 유무고래이고, 유무고래 끝자락에는 한족사람들의 소 방목지가 있고 산 비탈면은 경사가 급하여 사람들이 다니기가 힘든 곳이다. 탈북자들은 한줌의 쌀을 구하기 위하여 그 먼 유무고래 산에다가 땅을 파서 굴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시거마을에 내려와 삯일을 하고는 그 대가로 쌀이나 채소, 된장과 간장 같은 기초 생활필수품들을 구해다가 먹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가라고 하여야 자기가 일한 것을 매일 받아가는 것도 아니고 어느집에서 며칠을 일하고 쌀과 채소를 얻어 가는데 그 값어치는 탈북자들이 지불한 노동력 지불의 5/1- 10/1 밖에는 아니 되었다.

1998년 5월에 그곳에서 내가 초막에서 살 때에만 하여도 탈북자들은 자기가 일하는 집에서 함께 먹고 잠을 자면서 집주인들과 함께 일하러 갔으며 1999-2000년 까지 볼일이 있어 그곳에 자주 가보았어도 땅굴에 사는 사람들은 없었다.

3년 후의 오늘날은 완전히 변하여 여기 저기 땅굴이나 파고 그 속에 들어가 숨어사는 신세가 되였으며 어데를 가도 찬밥 한 덩어리 얻어 먹기 힘든 상황이 되여 버렸다. 나는 그곳에 있는 탈북자들의 생활정형을 듣고 난 다음 이번 길에는 탈북자들을 만나지 않기로 생각을 하였다. 탈북자들 중에는 나의 얼굴을 아는 사람도 있었고 탈북자 지원보다 실태 료해 차원에서 들어 왔기에 그들에 대하여서는 다음 기회에 만나고 도와드리려고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나는 여기 저기를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본 결과는 한국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탈북자 지원을 한다는 선교단체나 인권운동을 하시는 분들 중에 잘못된 정보를 가공하여 확산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게 되었다. 중국에서 체류하는 전 과정에 나의 머리 속에는 어두운 방에서 축 처진 어깨를 드리우고 왜서인지 그리도 불안해 하며 떨고 있던 옥별이 모습이 자꾸만 생각나군 한다.

그 아이를 공부시키는 것도 어느 정도이지 계속 중국에 놓아둔다면 저 아이도 크면 반드시 노예로 되고 말 것이다. 내가 노예로 살았고 지금도 수많은 노예들이 한마디의 항변이나 저항도 못하고 공안에 잡혀가고 임금을 요구하였다고 하여 매를 맞고 고발 당하고 쫓겨나고, 옥별이도 크면 피할 수가 없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

나는 옥별이에 대한 나의 생각을 중국분들께는 말씀드리지 않고 어떻게 하나 옥별이와 철호는 한국행을 하여야 한다고 굳게 마음 먹었다.

2004년 1월초에 백두한라회장으로 일하면서 자유북한 방송국 개국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시는 성민형에게 메일과 전화로 여기 사정을 말씀드리면서 옥별이와 철호를 안전하게 한국으로 갈수 있게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중국내에서 움직이는 모든 재정부분은 내가 담당하겠으니 선을 빨리 찾아달라고 하였다.

며칠후에 부모 없는 아이들을 한국으로 갈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연락이 나에게로 왔다. 도와주시겠다는 분은 백두한라회에서 봉사 활동도 함께 하여 본적이 있는 민규선생이였고 우리는 구체적인 안을 마련하고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이제 며칠후이면 아이들을 옮겨놓을 장소도 마련 하여야 하고 어린 아이들을 책임지고 데려가야 될 사람을 선택하여야 하는데 나로서는 처음 하는 일이라 아이들을 데려 가다가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근심과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한번은 목단강쪽에 가서 일을 보고 있는데 동씨가 나보고 급히 룡정으로 오라고 하면서 말하는 것이 자기의 아들이 룡정으로 들어오고 있는데 중국사람들에게 인질로 잡힐 위험이 있으니 네가 도중에서 자기의 아들을 가로채 가지고 다른 곳으로 빼돌려 달라고 한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더구나 자기의 아들이라고 하니 나는 급히 룡정으로 돌아와 동씨를 만날 수가 있었다. 긴 이야기를 나눌 사이도 없이 동씨의 아들을 빼돌려 놓을 집부터 확인하고는 공농촌 근방에 있는 다방으로 갔다. 동씨와 동씨의 아들을 데려오는 것을 주선하는 사람은 다방안에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하는데 더 쉽게 말하여 돈을 더 달라고, 돈을 깎아서 받으라고 하는 내용을 자기네 나름대로의 외교용어를 쓰면서 지루하게 말하고 있다.

얼마 후 동씨의 아들을 태운 택시가 나타나고 일행들이 차에서 내려 이러저러한 말을 하는 사이에 나는 동씨의 아들을 택시에 태워가지고 골목으로 빠져 나갔다. 그 다음날 동씨의 아들을 북경으로 데려갈 사람이 우리가 있는 집에 왔었고 그는 자기네는 경찰을 끼고 어쩐다고 말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사기였고 그런 사람들에게 탈북자들을 맡겼다가는 큰일 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사람이 화룡과 룡정에서 이름있는 브로커란다. 동씨는 그 브로커와 함께 북경에 갔다온 것을 두고 두고 후회하고 있다. 그 브로커는 차칸에서도 경찰이 오면 슬그머니 자리를 떠서 피하고 여관에서도 함께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인간성이라고는 찾아 볼려고 하여도 찾을 수가 없는 사람이 였다.

나는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하였기에 나의 일군과 나만큼은 언제나 탈북자들과 함께 하였다.한국에서도 많이 듣고 중국에서도 직접 보니 일군을 잘 선택하여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실하여 진다.

나는 큰 품을 들이지 않고 아이들을 며칠간 돌보아 주겠다는 분을 찾을 수가 있었고 왕청에 계시는 분에게 며칟날까지 아이들을 저녁 늦은 차를 이용하여 연길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드리였다. 다음날 낮에 나에게 한통의 전화가 왔다. 아이들을 당장에 빼여 돌리지 않으면 큰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때문에 그렇게 급해하는가? 물어보니 철호가 있던 집 내외 노인이 철호가 다른 곳으로 가면 후원금이 없어지고 생계가 곤란하여 지기에 철호가 자기의 집에 서 나가면 즉시 공안에 신고 하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 저녁 늦은 차로 연길에 아이들과 함께 나오시면 내가 아이들을 받아서 돌보겠다고 말씀드리고 연길로 나가서 아이들을 받을 준비를 하였다. 이제 아이들이 오면 마음을 안정시키고는 그들이 입고갈 옷을 장만하면 된다.

나는 약속시간이 되여 연길시의 모 지점에 나가서 철호와 옥별이를 만날 수가 있었고 동행하여 오신 분과 함께 아이들이 있을 숙소로 향하였다. 옥별이와 철호는 내가 처음 보았을 때 보다 많이 환해진 것 같고 아이들도 어디론가 좋은 데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즐거워 하고 있다.

함께 오신 선생님은 철호가 있던 집에서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여 철호를 자신이 아는분네 집에 숨겨두고 온밤 쉬지 못하고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그날 밤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북경에 데려 갈수 있겠는가를 오랜 시간에 걸쳐 토론을 하였다. 옥별이를 데려온 선생님이 철호와 옥별이를 아들딸처럼 위장하고 아이들이 갖고 있던 학생증은 목에다 걸어 사람들이 다 볼 수가 있게 하며 열차는 북경행 열차의 침대를 타고 가면 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문제는 룡정에 있는 젊은 여자다. 그녀는 중국에 온지 6년이 넘었는데 중국어도 모르고 남편과 함께 구룡의 깊은 산에서 소나 방목하면서 살았기에 남편의 도움도 받기가 어려웠다. 나는 생각 끝에 남편되는 사람을 만나 내가 당신을 생각하여 북경까지 여자와 함께 갈수 있게 도와주겠는데 북경 까지는 열차 침대를 태워줄 것이며 침대표값은 내가 부담을 하겠으니 돌아오는 차표는 당신이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하니 그는 감사하여 몸둘바를 몰라한다.

북경에는 몇시차로 출발할 것이니 열차시간을 맞추어 역전에 나오셔서 대기하여 주실 것과
가끔씩 전화 연결을 유지하자고 말씀드리였다. 오후 느지막한 시간에 우리는 연길역에서 무사히 북경행 열차에 오를 수가 있었으며 나는 침대 구조와 자석번호를 확인한 후에 나와 인솔자 선생은 마주 앉고 선생의 량 옆에는 옥별이와 철호를 앉히어 한 가족이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하였다.

우리 뒤편 침대칸 2충과 3층은 젊은 여자와 남편이 하나씩 가지고 누워서 가라고 하였고, 열차안의 분위기를 몸에 익힌 다음 침대 맨 위쪽에 올라가 두 부부가 그러안고 잠을 자되 누군가가 깨워도 일어나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다.

내가 말하고 돌아서자 이들 부부는 3층에 올라가 서로 끌어안고 누워서는 꿈쩍도 않는다. 아무리 바빠도 분위기 파악을 하고 누워야지 침대에 오르자 곧 둘이 끌어안고 누워버리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닌가?

나는 열차에 오르기 전에 사 두었던 중국 잡지들을 그 부부에게 주면서 지금은 각자 자기 침대에 있으면서 책을 보는 척 하다가 열차가 떠날 쯤에 3층에 올라 가라고 말하였더니 그리하겠다고 대답하고는 금방 3층에 올라가 누워버린다.

그의 남편은 열차란 것을 생전에 처음 타보았고, 너무나 어리 숙한 사람이 였다. 경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성경의 말씀이 옳다고 말하여 준다. 아무리 한국에 가고 싶어도 정신 의지적으로 준비되지 못하면 열린 길도 찾아볼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함께 동행하시는 분들께도 위험을 끼칠 수가 있다.

지금 한국에 오시려는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100% 안전을 담보하여 줄 것을 바라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길은 중국 경내 어느 곳에도 없으며 단 ,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 나가고 그때 그때 대처 할 수 있는 요령들을 습득하고 인솔자의 의도를 잘 알고 그에 맞게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인솔하고 다녀 보면 어떤 분들은 경찰을 보기만 하여도 떨면서 머리를 들지 못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사고 날 확률이 아주 높아지게 된다.

옥별이와, 철호는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열차안에서 유쾌하고 즐겁게 마냥 웃고 뛰여 다닌다. 두려움에 떨기 보다는 백배는 나은 것이다. 우리 일행들은 몇 시간 뒤에 마음의 평안을 가자고 여행을 즐길 수가 있었다.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한창 재롱을 부리며 공부하여야 할 이 어린 아이들이 삶의 길을 찾아 자유를 찾아 위험이 무엇이고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부모와 같은 인솔자의 품에 안겨 고이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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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007 [쪽지 보내기] 2015-03-03 22:21 No. 1270300078
30 포인트 획득. 축하!
아이들이 무사해야 할텐데 중국에서는 같은 조선족이라도 연길사람하고는 사업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죠 조선족끼리도 엄청 싫어하죠 심양은 돈 맛을 알아서 돈이 조금 있다 생각하는 한국사람한테 죽어라 붙어 다닙니다. 중국에서 우리 교포들이 처음에는 지금필리핀에서 발생하는 일들처럼 비슷했습니다. 무슨말을 해도 소에 경 읽기식이고 일을 알려주어도 돌아서면 잃어 버리고 택시강도 빈번하고 지금도 시골지역은 택시강도 있습니다. 중국에서 죽으면 진짜 개값도 못 받아요 환장하죠 죽은사람 인명기록부(호구부)에 없으면 신문지 덮고 발로 차서 구석에 놓았다가 공안오면 치웁니다. 개가 죽어도 그렇게 안하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 중국에서 돈 많다고 잘난척하다가 1년도 못 버티고 도망갑니다. 양아치들 많았죠 약쟁이들도 많았고 연변에서 출발 연길에 약쟁이 사무실도 있어요 한국인 대상 약 파는늠들 ~~ 지금도 설치고있을걸요 장춘은 그래도 길림성의 수도라고 조금 살만한데 황사 장난아니지  뭐 북경하고 비교하면 장난이지만 ~~에궁 아이들이야기하다 또 삼천포로 빠졌네 우리보다 경제적 상황이 안좋은 나라 가면 다들 비슷한가봐요 뭐라고 이야기 하면 좀 살았다고 들어먹지도 않고 한마디 하면 공격성이 강해지고 그러다 세월 다 가는것 같아요 물론 저같은 사람은 파견 근무로 이리 저리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월급 받고 있었지만 동남아시아 국가 뿐만아니라 남미나 중남미에 가도 필리핀하고 비슷해요 나이젊은 사람들이나 모두 같은 상황이에요 미국도 마찬가지고 캐나다 러시아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강대국가면 그나마 한국 사람들 조용좀 하죠 ㅋㅋ 20여개국에 돌아다니면서 느꼈던 상황들하고 같이 연계해 주세요 쿠웨이트 킹님아 그러면 더더욱 인기 있는 실화 연재가 될것 같습니다. 
아리랑007 [쪽지 보내기] 2015-03-03 22:22 No. 1270300081
7 포인트 획득. ... 힘내세요!
@ 아리랑007 님에게...횡설수설 이었습니다. ㅋㅋ
manila2013 [쪽지 보내기] 2015-03-03 22:29 No. 1270300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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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랑007 님에게...쿠웨이트님이랑 친분있으시죠?
아리랑007 [쪽지 보내기] 2015-03-03 22:32 No. 1270300099
88 포인트 획득. 축하!
@ manila2013 님에게...아닙니다. 전혀 모르시는분입니다. 그러나 저분이 활동하시는것은 제가 어느부서(비밀)에 있을때 많이 보았습니다. 대충 누군지도 짐작이갑니다. 그래서 아는척하면서 글좀 남겼습니다. 저랑은 전혀 친분이 있는분이 아닙니다. 쿠웨이트킹님은 저를 전혀 모를실겁니다. 저도 모르는데 제 직감이 맞을거라 생각하는겁니다.
아리랑007 [쪽지 보내기] 2015-03-03 22:34 No. 1270300101
49 포인트 획득. 축하!
@ 아리랑007 님에게...아 한가지더 저는 순종 한국 사람입니다. 중국 파견 근무시 탈북자들의 안타까운 실상을 보았기에 연재되는 실화를 더더욱 관심있게 보는것입니다. 
허니비 [쪽지 보내기] 2015-03-03 23:37 No. 1270300237
5 포인트 획득. ... 힘내세요!
소설같군요...
대화명없음 [쪽지 보내기] 2015-03-04 00:04 No. 1270300277
85 포인트 획득. 축하!
글을 올리시는 분이 유상준씨가 아니라면 남의글을 퍼오실때는 출처를남기는게 상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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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투바디 [쪽지 보내기] 2015-03-04 02:22 No. 1270300452
59 포인트 획득. 축하!
북한 관련 글을 읽으면 이상해지는 건 저뿐인가요 ?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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