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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s : 10,461 2019-07-13 06:44
자유게시판 1274319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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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고무신 [쪽지 보내기] 2019-07-13 06:46 No. 1274319620
222 포인트 획득. 축하!
답답헌 세상~

일본이 반대로 한국이 요구하는것을 들어줘도 될것 갇으내요
sorichonsa@네이버-75 [쪽지 보내기] 2019-07-13 08:19 No. 1274319651
4 포인트 획득. ... 힘내세요!
미래지향적..
흑랑@네이버-51 [쪽지 보내기] 2019-07-13 08:28 No. 1274319658
313 포인트 획득. 축하!
한국전때 일본이 도와줬다구요??? 제가 알기론 전범국이라 참전 못했고 그때문에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한국에 못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모르 [쪽지 보내기] 2019-07-13 11:55 No. 1274319831
@ 흑랑@네이버-51 님에게...

-일본의 ‘6·25 개입’ 어떻게 이뤄졌나-

일본이 6·25전쟁 때 한반도에서 미군이 주도한 유엔군을 도와 실질적 군사작전에 해당하는 활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던 사실이 국내외 각종 자료에서 확인됐다.


1945년 8월 태평양전쟁 패배 후 일본군은 한반도에서 물러갔다. 하지만 불과 5년 만인 50년 옛 일본 군인 등을 비롯한 다수의 일본인이 한반도에 다시 들어와 비밀리에 군사작전에 참여한 것이다.


중앙SUNDAY는 오쿠보 다케오(大久保武雄) 전 일본 해상보안청 장관의 회고록 『해명(海鳴)의 날들』(1978년), 일본 정부의 『해상보안청 50년사』(1998년), 일본 방위연구소 다니무라 후미오(谷村文雄) 연구원의 일본 특별소해대(掃海隊) 활동 관련 학술 논문, 일본 학자 오누마 히사오(大沼久夫)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발굴한 유엔군 총사령부(GHQ) 문서,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의 도쿄대 박사학위 논문(조선전쟁과 일본), 양영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부장이 발굴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대전 전투 관련 기록,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의 기획 보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6·25 일본 참전의 비밀’(박건식 연출) 등의 자료를 종합 분석해 일본의 6·25전쟁 관련 행적을 재구성했다.


최근 일본에서도 1950년 경찰예비대의 조직과 훈련 경험을 다룬 『반란병의 전언』이라는 전 대원의 자전적 소설이 발간돼 6·25와의 관련성이 새삼 화제를 모으고 있다.이들 내용을 종합하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일본 본토를 점령한 미군에 의해 해산됐던 옛 일본 군인들과 현직 공무원, 그리고 다수의 민간인이 여러 방향에서 6·25전쟁 기간에 한반도에서 전개된 군사작전에 투입됐다. 한때 미국 의회에서 논의했던 공식 전투병 파병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일본인들은 소총을 들고 전투도 했다. 교수는 “6·25전쟁은 북한과 중국·소련에 맞서 한국과 미국·일본이 함께 싸운 전쟁이었다”고 규정했다.


일본, 패전 5년 만에 재무장 첫 단추50년 6월 25일 오전 4시 김일성이 남침 도발해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정부와 일본에 있던 미 극동군사령부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27일 일본에 주둔하던 미 극동 해군과 공군이 한반도로 출동했고, 30일에는 4개 사단 규모의 주일 미 지상군이 들어왔다.전쟁 발발 초기 일본은 한국에서 철수한 미국인 등 2001명에게 긴급 피란처 역할을 했지만 다른 적극적 역할은 할 수 없었다. 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명목상 천황제가 유지됐지만 GHQ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일본의 실질적 통치자였다. 특히 GHQ를 주도한 미 극동군사령부는 46년 11월 대일본제국헌법을 수정해 ‘전쟁 포기, 전력 불보유, 교전권 부인’을 담은 새 일본국헌법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터지자 맥아더 사령관은 한반도로 출동한 주일 미군의 공백을 메운다는 명분으로 7월 8일 일본 경찰예비대를 창설한다. 경찰예비대는 52년 보안대를 거쳐 54년 사실상의 군대인 자위대로 탈바꿈한다. 2차 대전 패전 이후 불과 5년 만에 일본 재무장의 첫 단추를 미국이 끼워준 셈이다.


6월 27일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회원국의 한국 지원 결의안이 통과되고 7월 8일 유엔군이 창설되자 일본은 상당한 압력을 받는다. 하지만 평화헌법의 제약 때문에 갈등하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당시 총리는 북한군의 공세로 유엔군이 부산 일대까지 밀리자 8월 29일 맥아더 원수에게 “필요로 하는 어떤 시설과 노력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규슈(九州) 비행장과 사세보(佐世保) 해군기지가 미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일본인들은 한반도에 더 직접적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일본 해군과 육군 장교 출신 3명은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현지를 정찰하고, 인천항 수위가 가장 높아 상륙작전을 하기 좋은 시점이 9월 15일이라고 알려줬다.


 


미군 병참 업무도 일본인들이 맡아상륙작전에 앞서 옛 일본군 정보장교 200~300명은 한반도 식민지배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지도 등 상세한 한반도 지리 정보를 미군에 제공했다.


일본인들은 미군 상륙함(LST)에 탑승해 병참 업무도 맡았다. 심지어 일본의 한 중소기업은 상륙작전 때 쓸 사다리를 미군의 주문으로 제작해 공급했다는 증언도 있다.


9·28 서울 수복 직후 맥아더 사령관은 주력부대를 육로로 북상시키면서 제10군단에 원산상륙작전을 지시했다. 북상한 지상군의 원활한 보급을 위해 바다를 이용하겠다는 ‘임진왜란 전법’이었다. 10월 20일을 원산 상륙작전 D데이로 잡고 있던 미군에 복병이 나타났다. 9월 4일 진남포에서 북한군이 매설한 기뢰가 발견됐던 것이다. 원산 앞바다에도 소련제 기뢰 3000발이 매설된 것으로 드러났다.


다급해진 미 극동해군은 10월 2일 오쿠보 해상보안청 장관에게 일본 소해정의 작전 지원을 요청했다. 미군의 민감한 요청을 들은 오쿠보 장관은 즉시 요시다 총리에게 보고했다. 다니무라 후미오 일본 방위연구소 연구원의 논문에 따르면 당시 요시다 총리는 한반도 해역에서 진행하는 소해작업을 전투행위로 판단했다. 그 때문에 해상보안청법(25조)에서 비군사적 부대로 명시된 해상보안청 소해부대를 파견하는 것이 요시다 총리에게는 상당한 정치적 부담 요인이었다. 소해작전에 일본인이 투입된 사실이 외부로 공개될 경우의 파장을 의식한 요시다는 “기뢰를 제거해야 한다면 협력은 하되 비밀로 하라”고 지시했다.


 


‘6·25 파병’ 규모, 일본이 네 번째 10월 8일 일본 해군 출신이 주축이 된 일본 특별소해대원들은 시모노세키(下關)항을 출발했고, 도중에 이들에게 소총이 지급됐다. 원산 앞바다에서 미군과 함께 기뢰 제거 작업을 하던 17일 오후 일본 소해정 MS14호가 기뢰와 접촉했다. 이 사고로 나카타니 사카타로(中谷坂太郞·당시 21세)가 실종되고 22명이 다쳤다. 일본 정부는 전사 통보를 하면서 가족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원산뿐 아니라 진남포·해주·군산 앞바다에서 1200명의 일본 소해대원과 소해정 54척이 투입됐다.


남기정 교수는 “일본은 6·25전쟁 때 공식 참전한 유엔 16개 회원국에 이어 사실상 17번째 참전국이었다”며 “소해부대 대원 수만 따져도 일본은 미국·영국·프랑스에 이어 6·25 참전 규모로 보면 세계 4위 규모”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개입은 바다에서만 이뤄진 게 아니었다. 시라즈카란 일본인이 51년 11월 서울 인근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남하하던 북한군 저지 임무를 맡았던 미 24사단은 50년 7월 20일 대전에서 북한군 4사단 정예부대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윌리엄 딘 사단장이 포로가 된 당시 대전 전투 와중에 다수의 일본인이 소총을 들고 싸우다 사망했다(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자료). 이들은 일본 현지에서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다 우리 정부 승인도 없이 몰래 들어왔던 일본인 노무자들이었다.


일본인의 혈액도 한반도로 보내졌다.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일본 관동군 731부대 출신 군인들은 일본 혈액은행을 설립했다. 이들은 전쟁 중에 싼값에 일본인의 혈액을 사들여 한국 전선에 비싼 값에 되팔아 차익을 챙겼다. 후쿠오카(福岡)에 있던 유엔군 후방병원에는 일본 간호사들이 파견돼 미군을 치료했다.
하얀고무신 [쪽지 보내기] 2019-07-13 08:32 No. 1274319660
36 포인트 획득. 축하!
@ 흑랑@네이버-51 님에게...
한국전 당시 미군의 군수물자 수리를 해준 덕분에 때돈을 벌었다고 압니다
그것이 지금의 일본 경제 재건의 발판이 된것으로~
시오스 [쪽지 보내기] 2019-07-13 09:02 No. 1274319676
8 포인트 획득. ... 힘내세요!
쪽바리들 육시랄을 하네요....
뱃살어쩔건데 [쪽지 보내기] 2019-07-13 09:10 No. 1274319683
391 포인트 획득. 축하!
대충봐도 어려워보이는데요??
굴욕에 가깝구만
마카티_ [쪽지 보내기] 2019-07-13 09:12 No. 1274319687
8 포인트 획득. ... 힘내세요!
하..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
아큐페이셔널 [쪽지 보내기] 2019-07-13 09:19 No. 1274319697
187 포인트 획득. 축하!

1. 징용배상 안한다.

2. 한국이 중국에 대한 국방비를 전부 지원하라, 일본과 미국은 한국에 무기만 팔아 먹겠다.

3. 일본은 한국에 침략을 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적이 아니다.

4. 삼일절, 광복절에 일본을 비난하지 말고, 칭찬하라.

5. 한국 전쟁 당시 일본은 많은 부를 축적했다.또다시 전쟁이 나면 그때도 부를 축적할 것이다.

아주 굴욕적인 형태인데요.

저만 이렇게 생각합니까?

일본이 하는 짓거리가 더러워서, 빡치는 것은 저만 그럴까요?
아모르 [쪽지 보내기] 2019-07-13 11:57 No. 1274319835
@ 아큐페이셔널 님에게...

일본의 ‘6·25 개입’ 어떻게 이뤄졌나

일본이 6·25전쟁 때 한반도에서 미군이 주도한 유엔군을 도와 실질적 군사작전에 해당하는 활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던 사실이 국내외 각종 자료에서 확인됐다.


1945년 8월 태평양전쟁 패배 후 일본군은 한반도에서 물러갔다. 하지만 불과 5년 만인 50년 옛 일본 군인 등을 비롯한 다수의 일본인이 한반도에 다시 들어와 비밀리에 군사작전에 참여한 것이다.


중앙SUNDAY는 오쿠보 다케오(大久保武雄) 전 일본 해상보안청 장관의 회고록 『해명(海鳴)의 날들』(1978년), 일본 정부의 『해상보안청 50년사』(1998년), 일본 방위연구소 다니무라 후미오(谷村文雄) 연구원의 일본 특별소해대(掃海隊) 활동 관련 학술 논문, 일본 학자 오누마 히사오(大沼久夫)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발굴한 유엔군 총사령부(GHQ) 문서,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의 도쿄대 박사학위 논문(조선전쟁과 일본), 양영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부장이 발굴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대전 전투 관련 기록,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의 기획 보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6·25 일본 참전의 비밀’(박건식 연출) 등의 자료를 종합 분석해 일본의 6·25전쟁 관련 행적을 재구성했다.


최근 일본에서도 1950년 경찰예비대의 조직과 훈련 경험을 다룬 『반란병의 전언』이라는 전 대원의 자전적 소설이 발간돼 6·25와의 관련성이 새삼 화제를 모으고 있다.이들 내용을 종합하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일본 본토를 점령한 미군에 의해 해산됐던 옛 일본 군인들과 현직 공무원, 그리고 다수의 민간인이 여러 방향에서 6·25전쟁 기간에 한반도에서 전개된 군사작전에 투입됐다. 한때 미국 의회에서 논의했던 공식 전투병 파병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일본인들은 소총을 들고 전투도 했다. 교수는 “6·25전쟁은 북한과 중국·소련에 맞서 한국과 미국·일본이


일본, 패전 5년 만에 재무장 첫 단추50년 6월 25일 오전 4시 김일성이 남침 도발해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정부와 일본에 있던 미 극동군사령부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27일 일본에 주둔하던 미 극동 해군과 공군이 한반도로 출동했고, 30일에는 4개 사단 규모의 주일 미 지상군이 들어왔다.전쟁 발발 초기 일본은 한국에서 철수한 미국인 등 2001명에게 긴급 피란처 역할을 했지만 다른 적극적 역할은 할 수 없었다. 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명목상 천황제가 유지됐지만 GHQ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일본의 실질적 통치자였다. 특히 GHQ를 주도한 미 극동군사령부는 46년 11월 대일본제국헌법을 수정해 ‘전쟁 포기, 전력 불보유, 교전권 부인’을 담은 새 일본국헌법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터지자 맥아더 사령관은 한반도로 출동한 주일 미군의 공백을 메운다는 명분으로 7월 8일 일본 경찰예비대를 창설한다. 경찰예비대는 52년 보안대를 거쳐 54년 사실상의 군대인 자위대로 탈바꿈한다. 2차 대전 패전 이후 불과 5년 만에 일본 재무장의 첫 단추를 미국이 끼워준 셈이다.


6월 27일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회원국의 한국 지원 결의안이 통과되고 7월 8일 유엔군이 창설되자 일본은 상당한 압력을 받는다. 하지만 평화헌법의 제약 때문에 갈등하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당시 총리는 북한군의 공세로 유엔군이 부산 일대까지 밀리자 8월 29일 맥아더 원수에게 “필요로 하는 어떤 시설과 노력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규슈(九州) 비행장과 사세보(佐世保) 해군기지가 미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일본인들은 한반도에 더 직접적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일본 해군과 육군 장교 출신 3명은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현지를 정찰하고, 인천항 수위가 가장 높아 상륙작전을 하기 좋은 시점이 9월 15일이라고 알려줬다.


 


미군 병참 업무도 일본인들이 맡아상륙작전에 앞서 옛 일본군 정보장교 200~300명은 한반도 식민지배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지도 등 상세한 한반도 지리 정보를 미군에 제공했다.


일본인들은 미군 상륙함(LST)에 탑승해 병참 업무도 맡았다. 심지어 일본의 한 중소기업은 상륙작전 때 쓸 사다리를 미군의 주문으로 제작해 공급했다는 증언도 있다.


9·28 서울 수복 직후 맥아더 사령관은 주력부대를 육로로 북상시키면서 제10군단에 원산상륙작전을 지시했다. 북상한 지상군의 원활한 보급을 위해 바다를 이용하겠다는 ‘임진왜란 전법’이었다. 10월 20일을 원산 상륙작전 D데이로 잡고 있던 미군에 복병이 나타났다. 9월 4일 진남포에서 북한군이 매설한 기뢰가 발견됐던 것이다. 원산 앞바다에도 소련제 기뢰 3000발이 매설된 것으로 드러났다.


다급해진 미 극동해군은 10월 2일 오쿠보 해상보안청 장관에게 일본 소해정의 작전 지원을 요청했다. 미군의 민감한 요청을 들은 오쿠보 장관은 즉시 요시다 총리에게 보고했다. 다니무라 후미오 일본 방위연구소 연구원의 논문에 따르면 당시 요시다 총리는 한반도 해역에서 진행하는 소해작업을 전투행위로 판단했다. 그 때문에 해상보안청법(25조)에서 비군사적 부대로 명시된 해상보안청 소해부대를 파견하는 것이 요시다 총리에게는 상당한 정치적 부담 요인이었다. 소해작전에 일본인이 투입된 사실이 외부로 공개될 경우의 파장을 의식한 요시다는 “기뢰를 제거해야 한다면 협력은 하되 비밀로 하라”고 지시했다.


 


‘6·25 파병’ 규모, 일본이 네 번째 10월 8일 일본 해군 출신이 주축이 된 일본 특별소해대원들은 시모노세키(下關)항을 출발했고, 도중에 이들에게 소총이 지급됐다. 원산 앞바다에서 미군과 함께 기뢰 제거 작업을 하던 17일 오후 일본 소해정 MS14호가 기뢰와 접촉했다. 이 사고로 나카타니 사카타로(中谷坂太郞·당시 21세)가 실종되고 22명이 다쳤다. 일본 정부는 전사 통보를 하면서 가족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원산뿐 아니라 진남포·해주·군산 앞바다에서 1200명의 일본 소해대원과 소해정 54척이 투입됐다.


남기정 교수는 “일본은 6·25전쟁 때 공식 참전한 유엔 16개 회원국에 이어 사실상 17번째 참전국이었다”며 “소해부대 대원 수만 따져도 일본은 미국·영국·프랑스에 이어 6·25 참전 규모로 보면 세계 4위 규모”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개입은 바다에서만 이뤄진 게 아니었다. 시라즈카란 일본인이 51년 11월 서울 인근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남하하던 북한군 저지 임무를 맡았던 미 24사단은 50년 7월 20일 대전에서 북한군 4사단 정예부대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윌리엄 딘 사단장이 포로가 된 당시 대전 전투 와중에 다수의 일본인이 소총을 들고 싸우다 사망했다(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자료). 이들은 일본 현지에서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다 우리 정부 승인도 없이 몰래 들어왔던 일본인 노무자들이었다.


일본인의 혈액도 한반도로 보내졌다.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일본 관동군 731부대 출신 군인들은 일본 혈액은행을 설립했다. 이들은 전쟁 중에 싼값에 일본인의 혈액을 사들여 한국 전선에 비싼 값에 되팔아 차익을 챙겼다. 후쿠오카(福岡)에 있던 유엔군 후방병원에는 일본 간호사들이 파견돼 미군을 치료했다.
아큐페이셔널 [쪽지 보내기] 2019-07-15 10:42 No. 1274321502
10 포인트 획득. ... 힘내세요!
@ 아모르 님에게...

너의 논리로 따지면,

임진왜란 때 이순신 편에서 싸운 일본인이 있었으므로,

임진왜란이 일본과 일본의 전쟁이다.

이 말인데,

너의 오류가 정말로 입을 다물게 하는 터무니없구나.

에라이 쪽바리야~~

너의 나라로 꺼져라~~
니머리위 [쪽지 보내기] 2019-07-13 09:29 No. 1274319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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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큐페이셔널 님에게...
정답입니다..

말이 그럴듯 문구화했지 속뜻은 아주 교활한 내용인데..

문구뒤의 속뜻풀이를 정확하게 해주셨네요..ㅎㅎㅎ
유진아비 [쪽지 보내기] 2019-07-13 09:29 No. 1274319713
108 포인트 획득. 축하!
@ 아큐페이셔널 님에게...
먹이를 주지마세요.
자판을 누르는 칼로리가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관심을 주면 계속 올려요.
anjes [쪽지 보내기] 2019-07-13 09:38 No. 1274319720
52 포인트 획득. 축하!
한국전당시 일본은 미군 군수품등 조달해주는등 작다면작고 크다면 큰겁니다
한국경제 발전에도 도움준건인정해야하고 전자제품수출한거 일본제품 구입해 다시메이딩 자펜 지우고 메이딩코리아로 다시새겨 수출등했고.
아모르 [쪽지 보내기] 2019-07-13 12:03 No. 1274319841
@ anjes 님에게...

일본의 ‘6·25 개입’ 어떻게 이뤄졌나

일본이 6·25전쟁 때 한반도에서 미군이 주도한 유엔군을 도와 실질적 군사작전에 해당하는 활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던 사실이 국내외 각종 자료에서 확인됐다.


1945년 8월 태평양전쟁 패배 후 일본군은 한반도에서 물러갔다. 하지만 불과 5년 만인 50년 옛 일본 군인 등을 비롯한 다수의 일본인이 한반도에 다시 들어와 비밀리에 군사작전에 참여한 것이다.


중앙SUNDAY는 오쿠보 다케오(大久保武雄) 전 일본 해상보안청 장관의 회고록 『해명(海鳴)의 날들』(1978년), 일본 정부의 『해상보안청 50년사』(1998년), 일본 방위연구소 다니무라 후미오(谷村文雄) 연구원의 일본 특별소해대(掃海隊) 활동 관련 학술 논문, 일본 학자 오누마 히사오(大沼久夫)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발굴한 유엔군 총사령부(GHQ) 문서,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의 도쿄대 박사학위 논문(조선전쟁과 일본), 양영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부장이 발굴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대전 전투 관련 기록,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의 기획 보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6·25 일본 참전의 비밀’(박건식 연출) 등의 자료를 종합 분석해 일본의 6·25전쟁 관련 행적을 재구성했다.


최근 일본에서도 1950년 경찰예비대의 조직과 훈련 경험을 다룬 『반란병의 전언』이라는 전 대원의 자전적 소설이 발간돼 6·25와의 관련성이 새삼 화제를 모으고 있다.이들 내용을 종합하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일본 본토를 점령한 미군에 의해 해산됐던 옛 일본 군인들과 현직 공무원, 그리고 다수의 민간인이 여러 방향에서 6·25전쟁 기간에 한반도에서 전개된 군사작전에 투입됐다. 한때 미국 의회에서 논의했던 공식 전투병 파병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일본인들은 소총을 들고 전투도 했다. 교수는 “6·25전쟁은 북한과 중국·소련에 맞서 한국과 미국·일본이 함께 싸운 전쟁이었다”고 규정했다.




일본, 패전 5년 만에 재무장 첫 단추50년 6월 25일 오전 4시 김일성이 남침 도발해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정부와 일본에 있던 미 극동군사령부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27일 일본에 주둔하던 미 극동 해군과 공군이 한반도로 출동했고, 30일에는 4개 사단 규모의 주일 미 지상군이 들어왔다.전쟁 발발 초기 일본은 한국에서 철수한 미국인 등 2001명에게 긴급 피란처 역할을 했지만 다른 적극적 역할은 할 수 없었다. 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명목상 천황제가 유지됐지만 GHQ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일본의 실질적 통치자였다. 특히 GHQ를 주도한 미 극동군사령부는 46년 11월 대일본제국헌법을 수정해 ‘전쟁 포기, 전력 불보유, 교전권 부인’을 담은 새 일본국헌법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터지자 맥아더 사령관은 한반도로 출동한 주일 미군의 공백을 메운다는 명분으로 7월 8일 일본 경찰예비대를 창설한다. 경찰예비대는 52년 보안대를 거쳐 54년 사실상의 군대인 자위대로 탈바꿈한다. 2차 대전 패전 이후 불과 5년 만에 일본 재무장의 첫 단추를 미국이 끼워준 셈이다.


6월 27일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회원국의 한국 지원 결의안이 통과되고 7월 8일 유엔군이 창설되자 일본은 상당한 압력을 받는다. 하지만 평화헌법의 제약 때문에 갈등하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당시 총리는 북한군의 공세로 유엔군이 부산 일대까지 밀리자 8월 29일 맥아더 원수에게 “필요로 하는 어떤 시설과 노력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규슈(九州) 비행장과 사세보(佐世保) 해군기지가 미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일본인들은 한반도에 더 직접적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일본 해군과 육군 장교 출신 3명은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현지를 정찰하고, 인천항 수위가 가장 높아 상륙작전을 하기 좋은 시점이 9월 15일이라고 알려줬다.


 


미군 병참 업무도 일본인들이 맡아상륙작전에 앞서 옛 일본군 정보장교 200~300명은 한반도 식민지배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지도 등 상세한 한반도 지리 정보를 미군에 제공했다.


일본인들은 미군 상륙함(LST)에 탑승해 병참 업무도 맡았다. 심지어 일본의 한 중소기업은 상륙작전 때 쓸 사다리를 미군의 주문으로 제작해 공급했다는 증언도 있다.


9·28 서울 수복 직후 맥아더 사령관은 주력부대를 육로로 북상시키면서 제10군단에 원산상륙작전을 지시했다. 북상한 지상군의 원활한 보급을 위해 바다를 이용하겠다는 ‘임진왜란 전법’이었다. 10월 20일을 원산 상륙작전 D데이로 잡고 있던 미군에 복병이 나타났다. 9월 4일 진남포에서 북한군이 매설한 기뢰가 발견됐던 것이다. 원산 앞바다에도 소련제 기뢰 3000발이 매설된 것으로 드러났다.


다급해진 미 극동해군은 10월 2일 오쿠보 해상보안청 장관에게 일본 소해정의 작전 지원을 요청했다. 미군의 민감한 요청을 들은 오쿠보 장관은 즉시 요시다 총리에게 보고했다. 다니무라 후미오 일본 방위연구소 연구원의 논문에 따르면 당시 요시다 총리는 한반도 해역에서 진행하는 소해작업을 전투행위로 판단했다. 그 때문에 해상보안청법(25조)에서 비군사적 부대로 명시된 해상보안청 소해부대를 파견하는 것이 요시다 총리에게는 상당한 정치적 부담 요인이었다. 소해작전에 일본인이 투입된 사실이 외부로 공개될 경우의 파장을 의식한 요시다는 “기뢰를 제거해야 한다면 협력은 하되 비밀로 하라”고 지시했다.


 


‘6·25 파병’ 규모, 일본이 네 번째 10월 8일 일본 해군 출신이 주축이 된 일본 특별소해대원들은 시모노세키(下關)항을 출발했고, 도중에 이들에게 소총이 지급됐다. 원산 앞바다에서 미군과 함께 기뢰 제거 작업을 하던 17일 오후 일본 소해정 MS14호가 기뢰와 접촉했다. 이 사고로 나카타니 사카타로(中谷坂太郞·당시 21세)가 실종되고 22명이 다쳤다. 일본 정부는 전사 통보를 하면서 가족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원산뿐 아니라 진남포·해주·군산 앞바다에서 1200명의 일본 소해대원과 소해정 54척이 투입됐다.


남기정 교수는 “일본은 6·25전쟁 때 공식 참전한 유엔 16개 회원국에 이어 사실상 17번째 참전국이었다”며 “소해부대 대원 수만 따져도 일본은 미국·영국·프랑스에 이어 6·25 참전 규모로 보면 세계 4위 규모”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개입은 바다에서만 이뤄진 게 아니었다. 시라즈카란 일본인이 51년 11월 서울 인근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남하하던 북한군 저지 임무를 맡았던 미 24사단은 50년 7월 20일 대전에서 북한군 4사단 정예부대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윌리엄 딘 사단장이 포로가 된 당시 대전 전투 와중에 다수의 일본인이 소총을 들고 싸우다 사망했다(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자료). 이들은 일본 현지에서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다 우리 정부 승인도 없이 몰래 들어왔던 일본인 노무자들이었다.


일본인의 혈액도 한반도로 보내졌다.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일본 관동군 731부대 출신 군인들은 일본 혈액은행을 설립했다. 이들은 전쟁 중에 싼값에 일본인의 혈액을 사들여 한국 전선에 비싼 값에 되팔아 차익을 챙겼다. 후쿠오카(福岡)에 있던 유엔군 후방병원에는 일본 간호사들이 파견돼 미군을 치료했다.
anjes [쪽지 보내기] 2019-07-13 19:00 No. 127432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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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모르 님에게...
그럼 일본이 한국을도와 북괴군저지하는데 큰도움을준건데ㅠ
아모르 [쪽지 보내기] 2019-07-14 02:58 No. 1274320471
10 포인트 획득. ... 힘내세요!
@ anjes 님에게...
전후 일본 헌법상 다른나라에 군대를 파견하지 못하기에 비밀로 했던것이죠.
mrgre****@네이버-48 [쪽지 보내기] 2019-07-13 09:56 No. 1274319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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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좀 하자구요.
아베편 동경으로 이사가고
김정은편 평양으로 이사가고.
Dreams came true
Tom Ryu@페이스북-MJ [쪽지 보내기] 2019-07-13 09:58 No. 1274319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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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나라나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는 다 있을거에요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똑바로 인지하고 힘을 길러야 합니다. 혼자 살아갈수 없는 세상이지만 혼자서도 살아갈수있게 노력해야 합니다 경제보복따위 콧웃음 치며 오히려 한국의 한마디에 미안하다 잘못했다 사과 받을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보96 [쪽지 보내기] 2019-07-13 10:35 No. 1274319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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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당시 일본이 참전을 했나요? 도와줘 다고요? 한국 전쟁을 이용해 돈 벌이를 해서 경제 성장을 했을 뿐입니다. 개뿔 한국 역사 교과서에 기록은,,,엿이나 먹으라고 하세요.
아모르 [쪽지 보내기] 2019-07-13 12:11 No. 1274319847
@ 바보96 님에게...

일본의 ‘6·25 개입’ 어떻게 이뤄졌나

일본이 6·25전쟁 때 한반도에서 미군이 주도한 유엔군을 도와 실질적 군사작전에 해당하는 활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던 사실이 국내외 각종 자료에서 확인됐다.


1945년 8월 태평양전쟁 패배 후 일본군은 한반도에서 물러갔다. 하지만 불과 5년 만인 50년 옛 일본 군인 등을 비롯한 다수의 일본인이 한반도에 다시 들어와 비밀리에 군사작전에 참여한 것이다.


중앙SUNDAY는 오쿠보 다케오(大久保武雄) 전 일본 해상보안청 장관의 회고록 『해명(海鳴)의 날들』(1978년), 일본 정부의 『해상보안청 50년사』(1998년), 일본 방위연구소 다니무라 후미오(谷村文雄) 연구원의 일본 특별소해대(掃海隊) 활동 관련 학술 논문, 일본 학자 오누마 히사오(大沼久夫)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발굴한 유엔군 총사령부(GHQ) 문서,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의 도쿄대 박사학위 논문(조선전쟁과 일본), 양영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부장이 발굴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대전 전투 관련 기록,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의 기획 보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6·25 일본 참전의 비밀’(박건식 연출) 등의 자료를 종합 분석해 일본의 6·25전쟁 관련 행적을 재구성했다.


최근 일본에서도 1950년 경찰예비대의 조직과 훈련 경험을 다룬 『반란병의 전언』이라는 전 대원의 자전적 소설이 발간돼 6·25와의 관련성이 새삼 화제를 모으고 있다.이들 내용을 종합하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일본 본토를 점령한 미군에 의해 해산됐던 옛 일본 군인들과 현직 공무원, 그리고 다수의 민간인이 여러 방향에서 6·25전쟁 기간에 한반도에서 전개된 군사작전에 투입됐다. 한때 미국 의회에서 논의했던 공식 전투병 파병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일본인들은 소총을 들고 전투도 했다. 교수는 “6·25전쟁은 북한과 중국·소련에 맞서 한국과 미국·일본이 함께 싸운 전쟁이었다”고 규정했다.



일본, 패전 5년 만에 재무장 첫 단추50년 6월 25일 오전 4시 김일성이 남침 도발해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정부와 일본에 있던 미 극동군사령부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27일 일본에 주둔하던 미 극동 해군과 공군이 한반도로 출동했고, 30일에는 4개 사단 규모의 주일 미 지상군이 들어왔다.전쟁 발발 초기 일본은 한국에서 철수한 미국인 등 2001명에게 긴급 피란처 역할을 했지만 다른 적극적 역할은 할 수 없었다. 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명목상 천황제가 유지됐지만 GHQ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일본의 실질적 통치자였다. 특히 GHQ를 주도한 미 극동군사령부는 46년 11월 대일본제국헌법을 수정해 ‘전쟁 포기, 전력 불보유, 교전권 부인’을 담은 새 일본국헌법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터지자 맥아더 사령관은 한반도로 출동한 주일 미군의 공백을 메운다는 명분으로 7월 8일 일본 경찰예비대를 창설한다. 경찰예비대는 52년 보안대를 거쳐 54년 사실상의 군대인 자위대로 탈바꿈한다. 2차 대전 패전 이후 불과 5년 만에 일본 재무장의 첫 단추를 미국이 끼워준 셈이다.


6월 27일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회원국의 한국 지원 결의안이 통과되고 7월 8일 유엔군이 창설되자 일본은 상당한 압력을 받는다. 하지만 평화헌법의 제약 때문에 갈등하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당시 총리는 북한군의 공세로 유엔군이 부산 일대까지 밀리자 8월 29일 맥아더 원수에게 “필요로 하는 어떤 시설과 노력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규슈(九州) 비행장과 사세보(佐世保) 해군기지가 미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일본인들은 한반도에 더 직접적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일본 해군과 육군 장교 출신 3명은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현지를 정찰하고, 인천항 수위가 가장 높아 상륙작전을 하기 좋은 시점이 9월 15일이라고 알려줬다.


 


미군 병참 업무도 일본인들이 맡아상륙작전에 앞서 옛 일본군 정보장교 200~300명은 한반도 식민지배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지도 등 상세한 한반도 지리 정보를 미군에 제공했다.


일본인들은 미군 상륙함(LST)에 탑승해 병참 업무도 맡았다. 심지어 일본의 한 중소기업은 상륙작전 때 쓸 사다리를 미군의 주문으로 제작해 공급했다는 증언도 있다.


9·28 서울 수복 직후 맥아더 사령관은 주력부대를 육로로 북상시키면서 제10군단에 원산상륙작전을 지시했다. 북상한 지상군의 원활한 보급을 위해 바다를 이용하겠다는 ‘임진왜란 전법’이었다. 10월 20일을 원산 상륙작전 D데이로 잡고 있던 미군에 복병이 나타났다. 9월 4일 진남포에서 북한군이 매설한 기뢰가 발견됐던 것이다. 원산 앞바다에도 소련제 기뢰 3000발이 매설된 것으로 드러났다.


다급해진 미 극동해군은 10월 2일 오쿠보 해상보안청 장관에게 일본 소해정의 작전 지원을 요청했다. 미군의 민감한 요청을 들은 오쿠보 장관은 즉시 요시다 총리에게 보고했다. 다니무라 후미오 일본 방위연구소 연구원의 논문에 따르면 당시 요시다 총리는 한반도 해역에서 진행하는 소해작업을 전투행위로 판단했다. 그 때문에 해상보안청법(25조)에서 비군사적 부대로 명시된 해상보안청 소해부대를 파견하는 것이 요시다 총리에게는 상당한 정치적 부담 요인이었다. 소해작전에 일본인이 투입된 사실이 외부로 공개될 경우의 파장을 의식한 요시다는 “기뢰를 제거해야 한다면 협력은 하되 비밀로 하라”고 지시했다.


 


‘6·25 파병’ 규모, 일본이 네 번째 10월 8일 일본 해군 출신이 주축이 된 일본 특별소해대원들은 시모노세키(下關)항을 출발했고, 도중에 이들에게 소총이 지급됐다. 원산 앞바다에서 미군과 함께 기뢰 제거 작업을 하던 17일 오후 일본 소해정 MS14호가 기뢰와 접촉했다. 이 사고로 나카타니 사카타로(中谷坂太郞·당시 21세)가 실종되고 22명이 다쳤다. 일본 정부는 전사 통보를 하면서 가족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원산뿐 아니라 진남포·해주·군산 앞바다에서 1200명의 일본 소해대원과 소해정 54척이 투입됐다.


남기정 교수는 “일본은 6·25전쟁 때 공식 참전한 유엔 16개 회원국에 이어 사실상 17번째 참전국이었다”며 “소해부대 대원 수만 따져도 일본은 미국·영국·프랑스에 이어 6·25 참전 규모로 보면 세계 4위 규모”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개입은 바다에서만 이뤄진 게 아니었다. 시라즈카란 일본인이 51년 11월 서울 인근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남하하던 북한군 저지 임무를 맡았던 미 24사단은 50년 7월 20일 대전에서 북한군 4사단 정예부대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윌리엄 딘 사단장이 포로가 된 당시 대전 전투 와중에 다수의 일본인이 소총을 들고 싸우다 사망했다(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자료). 이들은 일본 현지에서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다 우리 정부 승인도 없이 몰래 들어왔던 일본인 노무자들이었다.


일본인의 혈액도 한반도로 보내졌다.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일본 관동군 731부대 출신 군인들은 일본 혈액은행을 설립했다. 이들은 전쟁 중에 싼값에 일본인의 혈액을 사들여 한국 전선에 비싼 값에 되팔아 차익을 챙겼다. 후쿠오카(福岡)에 있던 유엔군 후방병원에는 일본 간호사들이 파견돼 미군을 치료했다.
coracora [쪽지 보내기] 2019-07-13 14:04 No. 1274319973
86 포인트 획득. 축하!
@ 아모르 님에게...
대체 이양반은 뭥미??????..ㅡ..ㅡ

동란때 일본이 돈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현세의

일본 아베 정부의 초극우적인 행각에 대한 무언의 대한민국

국민들의 불매 운동에 대해서 뭔?? 연관성 이라고 이따위

허무맹랑한 짓거리를..ㅡ.ㅡ..

친일 행위도 좋은데..상식 밖의 언행은 삼가 하심이 옳을 듯 하오..ㅜㅜ
Freelancer
Taguig City
02-855-5135
ygp5959@gmail.com
아모르 [쪽지 보내기] 2019-07-14 03:02 No. 1274320472
10 포인트 획득. ... 힘내세요!
@ coracora 님에게...
100년전 악감정으로 미래를 망치는 사람들이
과연 진보라고 불리워도 되는것인가 묻고 싶군요.
cedricson123 [쪽지 보내기] 2019-07-13 12:45 No. 1274319880
247 포인트 획득. 축하!
@ 아모르 님에게...
한국전쟁 당시 일본이 전쟁물자 공급 하면서 일본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은 세상이 다아는 사실이고
그렇게 부를 취하는데 물건을 사가는 미국에서 야 너네들 가지고 있는 장비로 기뢰좀 제거하라고 했고 그걸 거부할수 있었을까?
이걸 뭘 자유를 지키기위해 자원해서 도운 것처럼 왜곡하는 수법이 참.
누가 토착왜구라고 안할까봐.

cedricson123 [쪽지 보내기] 2019-07-13 11:00 No. 1274319777
103 포인트 획득. 축하!
다른 글에는 추천이 없는데 유독 여기만 추천이 있네.
토착왜구 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얘기이긴 하지만.
어제 방송한 다스뵈이다편 한번 들어보면 왜 아베가 그렇게 나오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더군요.
읿본인들의 인식의 변화와 우경화 그리고 그것에 편승한 아베.
여기도 보면 뉴라이트 사관에 젖은 생각이 모지른 족속들이 일본 대변하느라 고생들 한다.
태산봉 [쪽지 보내기] 2019-07-13 11:52 No. 1274319825
이정도로 나라를 팔아 먹겠다는 심산이네.
제3국이 왜 필요한지.자주국가를 부정하는군요.
중국에 센카쿠열도 분쟁에 총알받이 하라는군요.
군국주의에 빠져있는 놈들이 민주주의를 논하네요.
3.1절 패전기념일때마다.아베와 일왕은 석고대죄나 하길.
6.25때 군수물자로 2차 패전후 일본이 일어선 계기를 별도의 교과과정을 신설합시다.
개놈자식들.
이방인의꿈 [쪽지 보내기] 2019-07-13 13:52 No. 1274319965
114 포인트 획득. 축하!
정치는 명분의 싸움이죠. 미사여구 동원해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게 보통인데, 요즘의 상황은 그러기엔 물건너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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